천혜의 얼굴을 가진 바람의 고장, 제주도 한경면.
이곳에서 태고의 맛과 향기를 지키며 살아가는 어멍들.
깊은 바다에 숨겨진 보물 같은 맛과
넓은 숲속에 감춰진 추억의 한 상!
제주어로 버무리고 바람에 담아 완성하는
질박한 자연의 맛을 만나다!
제주도 서쪽 끝 바람의 땅에서 태고의 제주 밥상을 만나다!
태고 자연의 맛을 그대로 간직한 땅, 한경면. 바람이 많아 이곳을 지키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모진 곳이었지만, 그 속에서 나누고 절약하며 누구보다 지혜로운 밥상을 차릴 수 있었다. 절약 정신을 뜻하는 제주도 말 ‘조냥 정신’! 음식에 조냥 정신이 빠질 수 없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쉰밥을 아껴가며 만든 음료 ‘쉰다리’, 메밀 최대 산지인 제주에서 즐겨 먹었던 제주식 수제비 ‘조베기’, 이 음식을 나눠주는 아이가 왕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몰망묵적(모자반메밀적)’까지. 이번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태고 제주도의 맛과 향기를 만난다.
물에서는 해녀, 뭍에서는 농부! 서로를 의지하는 두 어멍의 우정 밥상
바닷바람과 함께 무르익은 고산1리. 한경면 앞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모진 바람이 물질과 농사를 모두 방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추억을 싣고 오는 바람을 웃으며 맞이할 수 있게 됐다는 김임생 씨! 그녀는 시집온 뒤 이름도 나이도 같은 고임생 씨와 만나 금세 친구가 됐다. 함께 물질하고 밭에 나간 세월이 50여 년. 모진 세월을 건너 서로의 보물이 된 두 사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밭에서 일을 돕고, 서로의 집에 오가며 함께 밥을 먹는다.
‘저승에서 번 돈을 이승에서 쓴다’는 말이 있다. 숨을 참고 물에 들어가는 건 저승에 가는 것만큼이나 힘들다는 어멍들! 늘 어렵게 공수해오는 오분자기와 소라로 꼬치구이를 만든다. 이외에도 직접 잡은 보말로 만든 보말조베기(보말수제비)부터 최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갈치와 호박을 넣어 끓인 달큰한 국까지. 어려웠던 시절의 가르침을 잊지 않은 어멍들의 조냥 정신(절약 정신)이 담긴 밥상을 만나본다.
곶자왈을 맨몸으로 가꾼 가족의 생명 밥상
곶자왈을 품은 한경면 저지리. 제주도에는 용암이 분출하며 만들어진 독특한 지형인 곶자왈이 곳곳에 분포한다. 숲을 뜻하는 ‘곶’, 덤불을 뜻하는 ‘자왈’. 이곳 원시림을 맨몸으로 가꾼 밀림의 부녀가 있다. 아버지 이형철 씨와 딸 이지영 씨는 숲을 가꿀 때 합이 가장 잘 맞는다. 나무와 돌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돌은 낭의지, 낭은 돌의지’라는 말처럼, 이형철 씨와 그의 가족들도 지난 세월 곶자왈과 닮은 모습으로 살아왔다. 직장생활을 하던 이형철 씨는 뇌경색으로 몸을 가누기 어렵게 되자, 퇴직한 뒤 이곳을 가꾸기 시작했다. 지영 씨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아버지 곁으로 와 일을 도왔다. 버려졌던 숲을 가꾸며 자연스레 몸도 마음도 치유가 됐다는데. 곶자왈에 부녀가 있다면 부엌에는 아내 문은자 씨가 있다. 그녀는 주로 아픈 남편의 음식을 만들다 보니 간이 약하고 자연의 맛에 충실한 제주도의 옛 음식들을 자주 만들게 됐다.
문은자 씨가 즐겨 만드는 제주도 음식 중 하나는 몰망묵적(모자반메밀적)! 메밀 최대 산지인 제주의 메밀을 사용해 만든다. 제주도는 육개장을 끓이는 방식도 독특하다. 잔치에 온 모든 이들에게 건더기를 공평하게 나눠주기 위해 고사리와 돼지고기를 으깨서 넣는다. 문은자 씨의 또 다른 특기 음식은 바로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양하 무침이다. 그리고 그와 찰떡궁합인 제주식 두루치기까지! 아픈 남편 덕에 건강한 제주 음식 지킴이가 된 가족, 그들의 생명 밥상을 만난다.
제주 옹기와 사랑에 빠진 셰프의 현대식 제주 밥상
중산간 지역에 자리한 조수리. 이곳에는 임서형 씨가 자주 찾는 옹기 마을이 있다. 황토와 화산토가 섞인 희귀한 흙 덕분에 제주의 옹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아도 윤이 흐른다. 100년 넘은 가마가 남아 있는 이곳에서 음식을 담을 그릇을 늘 신중하게 고른다는 임서형 씨. 물허벅을 지고 나르며 제주를 지켰던 여인들의 손맛을 음식에 그대로 재현해 보고자 한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해외 유학까지 다녀온 임서형 씨는 제주도의 옛 음식들을 공부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해녀학교를 다니며 물질도 배우고, 바닷가를 서성이며 식자재를 찾는다는 그녀! 그녀가 만들고자 하는 음식은 옛 제주의 모습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맛이다.
제주도는 잔치 때 손님에게 고기, 두부, 순대를 평등하게 담아서 내놓는 ‘반’이 있다. 당시를 떠올리며 쫄깃한 수웨(순대)와 부드러운 둠비(두부), 그리고 돼지고기엿을 뿌린 오겹살 구이까지 만든다. 그런데 임서형 씨의 기억에 깊이 자리 잡은 제주 음식은 따로 있다고! 바로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오르게 한다는 건옥돔죽! 참기름에 쌀을 볶아 건옥돔 육수와 함께 푹 끓이면,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는 자연주의 밥상이 입맛을 사로잡는다.
제주어를 지키는 마을 금등리! 이곳에 정착한 해녀를 품은 인심 밥상
한경면 금등리. 제주어 마을로 지정된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은 사라져가는 제주의 말과 기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금등리를 선택한 49살 허수정 씨. 직접 집을 짓는 것부터 농사일을 시작하기까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3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물질도 시작하며 마을에 적응했지만, 마을 어멍들 사이에 있으면 아직도 제주어를 완벽히 알아듣기는 어렵다는 그녀. 제주의 언어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바로 제주 음식이다. 마을의 해녀 회장이자 선배인 고일선 씨가 허수정 씨에게 제주의 맛을 전수해 주러 나섰다.
가장 먼저 배울 음식은 한치물회. 제주도에서 물회는 끓이지 않은 날된장을 넣고 만든다. 강한 양념을 쓰지 않는 제주도에서 맛을 낼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지원군이 있다. 바로 멸치어간장! 이웃 어멍이 손수 담은 멸치어간장을 넣고 직접 잡은 성게를 손질해 끓인 성게미역국부터 멸치어간장을 가득 발라 숯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워 침샘 제대로 자극하는 한치구이까지. 허수정 씨를 품어준 따뜻한 마을에서 넉넉한 인심을 배운다.